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원벽(金元壁, 1894. 5. 26.〜1928. 4. 12.) 선생을 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며, 경신학교(儆新學校)를 거쳐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 1년간 수학하다가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했다.
1919. 2. 22. 기독교 측의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 등으로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강기덕(康基德),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韓偉健)과 함께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받자 쾌히 응낙했다.
그 후 손병희(孫秉熙)로부터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탑골공원에서 개최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고 25일 정동교회 내의 이필주(李弼柱)의 집에서 학생 대표들을 소집, 각 전문학교와 중학생들을 3월 1일 오후 2시까지 탑골공원에 집합시켜 민족 대표들과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2월 28일 승동예배당에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다시 모여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배부받았으며, 3월 5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앞에 모여 2차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3월 1일 강기덕 등과 함께 군중을 지휘하면서 두 갈래로 나누어, 동쪽과 서쪽으로 독립만세운동 행진을 하다가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제지를 받았으나, 오후 늦게까지 만세운동을 했다.
3월 4일 각 학생 대표와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확인하고 시간과 장소를 오전 8시 남대문역 광장으로 정했다.
이튿날 약속 장소인 남대문역 광장에는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고, 강기덕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시위 군중을 지휘했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에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62년 김원벽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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